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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말정산/2025

8월 월말정산

by _hailey 2025. 11. 20.

 

짐을 싸고, 풀고, 다시 캐리어를 꾸리고, 낯선 호텔 방 천장을 마주하기를 반복했다. 집보다 집이 아닌 곳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새 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출장을 다녀야 했고, 돌아오면 또 짐을 챙겨 어딘가로 떠났다. 새로운 주소지에서조차 '잠시 머무는 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무더위는 모든 것을 끈적하게 만들었다.

나를 구원한 것은 거대한 사건이나 인연이 아니었다. 오직 나 혼자 행하는, 아주 사소하고도 절대적인 의식. 바로 샤워와 선풍기 앞의 시간이었다.

나는 8월 내내 샤워를 기다리며 살았다. 머리를 감고, 손끝에서 거품이 사라지며 물이 따라 내려가고, 마치 하루의 일부가 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볍게 물기를 털고, 얇은 반팔과 반바지를 입은 채, 선풍기 앞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선풍기 바람에 젖은 머리가 흔들리고, 옷감이 팔랑거리며 몸 표면을 식혀주는 동안 손에 들린 얇은 책도 바람에 조금씩 움직였고 나는 이 얇고 가벼운 것들이 주는 명료함 속에서 온전한 치유를 얻었다. 무거운 짐들은 모두 트렁크에, 불안한 미래는 마음속 깊은 곳에 넣어둔 채, 그것은 이상할 만큼 평화롭고, 설명하기 어렵게 좋은 순간이었다. 페이지는 가끔씩 내 마음보다 먼저 넘어갔다. 

선풍기 바람이 얼굴과 젖은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갈 때, 나는 내 몸의 뜨거운 열기와 함께 그 모든 '잡다한 생각들'이 펄럭거리며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시원함은 단지 온도를 낮추는 작용이 아니었다. 머릿속의 소음과 마음의 먼지를 날려보내고, 이 순간의 나만을 남겨두는 고요한 집중의 시간.

8월은 그런 달이었다. 새로운 공간에서 불안하게 적응하고, 업무의 흐름에 떠밀리듯 움직이면서, 정작 나를 제자리로 되돌려준 것은 선풍기 앞에 앉아 있던 그 짧은 순간들이었다. 그 순간에만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고, 생각이 비어 있는 동안에야 비로소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이사한 집은 아직 낯설다. 짐은 다 풀었지만 내 것이라는 느낌은 아직 오지 않는다. 아마도 나는 여전히 낯선 곳에서 살아가고 있고, 여전히 익숙해지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동시에 그런 애씀 속에서도 아주 작은 기쁨 하나가 나를 버티게 해준다는 사실을 배웠다. 거창한 의미 대신, 단지 젖은 머리와 바람, 얇은 옷과 가벼운 책이 내 하루를 붙잡고 있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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