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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말정산/2020

2월, 3월 월말정산

by _hailey 2020. 4. 14.

 

트리아농

 

 

 

별다른 일 없이 흘려보내 눌러쓴다. 

2월초, 매일 야근에 시달리던 나는, 나는, 그냥 너무 피곤했다. 번아웃이 왔나 싶게 모든 회사일이 힘에 부쳤다. 출근하는 날이면 퇴근길에 피곤해서 제대로 눈을 뜨고 온 날이 며칠 되지 않았다. 졸음도 아닌 정신의 피로함이 명료히 눈을 뜨고 집으로 돌아오는것을 끊임없이 방해했다. 잠이라도 잘 자면 좋을텐데, 이상하게 피곤하면 잠도 안오더라. 그렇게 내가 시간을 사는지 시간이 나를 사는지 모르게 지내다가, 3월부터는 일이 거의 없었다. COVID19 바이러스로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 권고가 중대본 브리핑에서 직접적으로 발표되면서는 마감과 발송일에만 최소인력으로 출근했다. 갑자기 찾아온 휴가 아닌 휴가에, 활동범위가 줄어들고 정적인 시간이 늘어나면서 같이 찾아온 많은 잡생각에 사로잡혀 시간을 보냈다.

 


 

미니멀 라이프를 시작했다. 발단은 별다른 게 아니었다. 휴일 아침이었나, 잠에서 막 깨어난 그대로 눈만 뜨고 햇살이 들어오는 방안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만약 지금 당장 이사를 가게 되어서 짐을 싼다면 얼마 정도의 짐이 나오게 될까 생각해보았다. 가구를 제외하고 이사용 네모난 박스에 들어갈 크고 작은 물건들만 따져도 상당한 양이었다. 거기까진 별 감흥 없이 지나간 잡생각이었다. 

코로나가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 기승을 부리면서 대구로 인력 지원을 갈수도 있는 상황이 있었다-내가 있는 곳의 상황이 더 악화되어 가지 않게 되었다-만약 지금 당장 내가 생활하는 곳에서 떠난다면, 그리고 한동안 혹은 꽤나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한다면 내가 싸야 할 짐에 포함돼야 할 것,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 꼭 필요한 물건들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한동안 내 손을 타지 않을, 남겨질 물건들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이 지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죽음이 날 스쳐갔다고 생각되는 상황이 있었다. 눈물도 없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만약 누군가가, 내 가족이, 친구가 내가 쓰던 물건들을 정리한다면, '그건 많지 않아야한다' 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삶이든, 시간이든, 사람이든, 물건이든, 완전히 혹은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거라면 애초에 집착과 미련을 지양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부터 방안의 물건들을, 사진들을, 컴퓨터 파일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책상 위에 늘어져있는 영수증부터, 지갑 속 사용하지 않는 포인트카드, 커피점 쿠폰, 명함들을 정리했다. 다음은 연필꽂이의 오래되어 말라붙어 잘 나오지 않는 형광펜이나 같은걸 여러 개 가지고 있는 사인펜, 네임펜 등을 정리했다. 버리기에 아까운 문구는 사무실에 가져가 사용했다. 어렸을 때부터 모아 온 편지나, 사모은 앨범 CD, 영화, 공연 티켓들도 사진만 남기고 모두 정리했다. 이전에 사용했던 다이어리들도 다시 꺼내어보면 설레지만 정리했다. 그새 사서 쌓아둔 책들도 중고서점에 모두 팔아 전자책을 구매했다. 이제 책은 주로 eBOOK으로 읽을 것이다.  

가장 만족감이 컸던건 화장품을 비우는 일이었다. 어차피 데일리로 사용하는 나에게 잘 어울리는, 내가 좋아하는 화장품은 정해져 있고 거의 대부분이 유튜브나 광고를 보고 충동적으로 구매한 것들이었기에 정리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특히 아이섀도와 립스틱은 한두 번 사용한 것이 전부인 것들이라 유통기한이 지난 건 버리고, 깨끗한 것들은 나눠주거나 팔았다. 잘 사용하지 않는 기초화장품은 손이나 목, 바디케어로 사용해서 비워내기로 했다. 

옷을 정리하는 일이 가장 오래걸리고, 어려웠다. 우선 지난 1년간 입지 않았던 옷들은 일단 모두 정리했다. 좋아하고 정리하기 아까운 옷들도 내가 입지 않고 사용하지 않으면 내것이 아니었고, 그것이 예쁜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한때 유행이거나 지나가다 충동적으로 산 옷들은 결국 나와 어울리다고 느끼지 않거나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느껴서 한두 번 입고 옷장에 보관되고 있었다. 대부분의 옷을 친구들에게 나눠주거나 당근 마켓에 내다 팔기도 했다. 애물단지였던 몇 번 입지 않은 무스탕과 가죽재킷은 친구가 가져갔는데, 너무 마음에 든다며 고마워했다. 새 주인을 찾지 못한 옷은 아름다운가게에 기부했다. 3박스 이상이면 택배기사님이 직접 수거하러 오신다고 하셔서 3박스를 채웠다. 기부 영수증을 신청하면 판매 금액이 정산되어 연말정산때 기부금 항목으로 산정된다고 한다.

 그렇게 가을, 겨울옷은 작은 옷장에 파카를 포함한 모든 옷이 들어갈 정도의 양이, 여름옷은 작은 공간박스 하나에 모두 들어갈 정도의 양이 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렇게 많이 옷을 정리했는데도, 예전처럼 입을 옷이 없다고 느껴지거나 옷이 적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정말 좋아하고 자주 입는 옷들만 남겨놓으니, 물리적인 공간은 넓어지고 만족감은 크다. 

처음엔 쉽게 버리지 못했다. 지금은 당장은 필요하지 않더라도, 내가 그 물건을 사고 방안에 들였을때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었고, 나중에 다시 필요해질지도 모른다는 걸 생각하면 쉽게 비워낼 수 없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니 그렇게 공간을 차지하고 물건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다시 그 물건이 필요해질 일이 정말 생길까, 다시 그 물건에 마음을 줄일 이 생길까, 일어나지 않은 일을 고려해 비우지 않는 것이 더 미련스럽게 느껴졌다. 이것도 일종의 물건에 대한, 걱정에 대한 집착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쉽게 우울하고 불안해지는 나이고, 이런 불안감을 꽤 오랫동안 소비로 채워왔던것을 스스로 모르던 바가 아니었기에 이런 비우는 행동들이 결과적으로 나중에 더 큰 우울로 찾아올까 봐 걱정했는데, 막상 실천해보니, 그리고 비워낸 방을 보니 오히려 홀가분하고, 후련하다. 이 방에 정말 내가 마음을 주지 않는 물건은 없구나.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없다는 생각이 들고 오히려 이제 필요 없는 물건이 비워진 자리에 더 좋은 물건이 채워질 생각을 하니 설레는 마음이 든다.

사람도, 물건도 머물때가 있고 흐를 때가 있어야 하지만 둘 다 시간 속에 속해있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은 원래 흐르는 것이 성질이니 나쁜 것도, 좋은 것도 모두 오래 머무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다. 흐르고, 비워져야 다시 채워지는 것은 당연하고, 새로운 것에서 좋은 기운을 얻고싶다.

많은 물건을 버렸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겉보기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크게 변한것도 없다. 하지만 만족감은 크다. 드디어 나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찾은 기분이 든다. 필요한 만큼만 갖기. 그리고 집착하지 말기. 미련 갖지 말기.

 


 

다도 수업을 이어 들었다. 중국차중 청차와 흑차를 맛보고 직접 우려 보는 시간이었는데, 지역에 따라, 차를 발효시키고 향을 입히는 방식에 따라 나뉘는 여러 종류의 차들을 접할 수 있었다. 아직은 미묘하게 다른 차는 잘 구별하지 못해서, 더 많은 차를 마시고 접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잎의 향을 맡으면 위에 얹혀있던 차가움과 어색함들이 찬찬히 가라앉아 편안해지는 기분이다. 잠도 곧잘 자는 것 같아 차가 점점 좋아진다. 요즘엔 커피보다 차를 더 많이 소비하게 되는 것 같다.

마지막 수업엔 첫시간에 배웠던 홍차와 에프터눈티를 즐길 수 있는 카페에서 모였다. 3단 디저트 트레이에 예쁘게 담겨 나오는 디저트와 깔끔한 차가 정말 맛있었다. 마침 햇살이 개기 시작한 날이라 창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테이블과 트레이에 닿는 모습이 정말 예뻤다. 차가 더 맛있게 느껴진건 그때문이 아닐까 싶다. 눈으로 보이는게 예쁘니까. 수업에 개근해서 보이차도 선물받았다. 집에서 아주 잘 우려먹고 있다.  

다도 수업을 듣는 분들과 번개 모임이 있었다. 포슬포슬 비가 오는 서울대입구역에서 생각지 못한 여은파를 즐겼다.. 저녁 식사를 하고 근처 찻집에서 배운대로 직접 개완을 해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커피 대신, 조용히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하는 게 정말 즐거웠다. 수업 동안에 선생님이 '즐거운 차생활'이라는 말을 종종 하셨는데, 정말 차를 곁에 두고 자주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본적으로 다도나 차를 소비하려는 사람들은 어지럽고 자극적인 것에서부터 거리를 두는 경향이 있음을 느낀다. 모임도 즐겁고, 차도 즐겁다. 즐거운 차생활.

 


 

데일리 리포트 라는걸 쓰고있다. 하루 안 내가 무얼 했는지 시간 단위로 쪼개어 기록해보는 것인데, 어떤 걸 했는지, 상세한 내용과 집중도를 기록하고 피드백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느 시간을 줄이고 좀 더 알찬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든다. 

요즘 하는일도 딱히 없는데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데, (아침에 출근할 때도 책을 꼭 읽었는데, 피곤해서인지 아침 시간 내내 졸면서 지하철과 버스에 앉아있기 일쑤이다.) 이번 기회로 시간을 잘 활용해서 무언가 새로 도전하고 바뀔 시간을 벌고 싶다. 요즘 들어 시간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무언가를 해볼까 해도 시간, 돈 둘 다쓰지 말고 돈만 쓰자 라는 생각이라던가, 무언가 결심하면 망설이지 말고 하자 라는 결심을 계속 다시 하고 있다. 시간은 돈을 주고도 얻을 수 없는 귀한 가치이니, 이걸 함부로 쓰지 말자는 생각이 강하다.

27번째 생일을 지난 나는, 30살까지 무언가 이루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원대하고 장대한 꿈은 잘 모르는 사람이라, 지금부터 이렇게 노력하고 시간을 들여 30살이 된 내가 그래도 나 열심히 살았어라는 생각이 들게 하고싶다. 다만, 자꾸만 망설여지는것이, 하고 싶은 것도, 사고 싶은 것도 모두 이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건가? 정말 나에게 필요한 건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이것도 내가 소유하고, 내게 속하고, 내가 실행하기까지 노력과 돈과 시간이 헛되이 쓰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생각인 것 같다. 생각은 짧게, 행동은 빠르게 하자라고 다짐했지만 쉽지 않다.

 


 

어떻게든 밀려오는 잡생각과 우울의 시간을 떨치려 노력하고 있지만 이것또한 쉽지 않다. 자꾸만 우울과 인생노잼의 사이클이 다시 돌려고 하는데, 몸을 아무리 혹사시키고 억지로 잠을 청해도 역시, 쉽지 않다. 그래도 더이상 날 내버려둘 수 없다. 코로나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을것이다 라는 전문가의 말이 자꾸 멤돈다. 꼭 코로나만 그렇겠는가, 난 이전의 나이브한(척하는) 태도와 불안한 정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것은 하루하루가 위태하며 금방이라도 사라질것 같던 나에게 가장 잘 맞는(생각이 적고 마음이라도 편한) 삶의 방식이였지만 꽤 오래전부터 외면하려 애쓰던 공황과, 직접적으로 마주한 우울앞에 이제 더이상 그것을 허용할 수 없게 되었다. 다짐이 아닌 직시다. 나라는 인간에 대한. 더이상 죽음을 동경할 자격이 없는 나약하고 생각만 많은 어른자격 없는 어른에 대한. 성장 없는 성장통이 이제 지겹다. 짜증이 난다. 평생 남한테 착한척하고 나한테 침뱉은 결과가 이거다. 더이상 내버려 둘 수 없다. 

그나마 내가 잘하는 거라곤 단지 기나긴 어두운 터널도 끝이 있으며 그 끝엔 차갑든지 따뜻하든지 빛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우스운건 정말로 그렇게 하고싶고, 그렇게 믿고싶다는 것이다. 

 

 

 

잘 사용한 것 : 크레마 사운드업, 배지터블 가죽 카드지갑, 핫탑, 선물받은 보이숙차(이름을 모르겠다)

잘 읽은 책 : 윤이형 <붕대감기>, 서밤<우리의 사랑은 언제 불행해질까>, 김현경 <사람,장소,환대>, 리처드 A 앱스타인 <공공의료제도의 치명적 위험>, 엘릭스 코브 <우울할땐 뇌과학>, 에리카 라인 <나는 인생에서 중요한것만 남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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