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 장마 끝에 가을이 찾아왔다. 캔들을 켜놓은 탓에 밤새 살짝 열어둔 창으로 지난밤보다 더 찬 공기가 들어온다. 이불 끝으로 스며든 차가움에 발을 웅크리고 핸드폰을 찾는다. 이제 5시가 기상시간이 되었네, 해는 짧아지고 밤은 길어지는 날들이 앞에 있다. 이런 새벽엔 거울 앞에 서지 않아도 마치 유체이탈이라도 한 것처럼 더 신기할 것도 없는 나 자신을 들여다본다. 더 이상 잠들지 못할걸 알면서도 이불을 걷어 일어나지 못하고 계속. 그렇게 마침내 두어 번 살자 살자를 반복하고 눈을 뜬다. 창 너머로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새벽빛에 방안의 실루엣들이 만들어진다. 시력이 돌아오고 뚜렷해질수록 현실로. 현실로.
다시 집을 나왔다. 혼자 생활이다. 지난달 계약서를 작성하고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조금씩 정리했다. 미니멀라이프를 한다고 짐을 많이 줄였는데도, 정리하고 나니 생각보다 박스가 많았다. 나도 모르게 또 무언가를 끌어안고 가고 있었구나. 쓰던 가구들을 정리하고 새 집에서 사용할 것을 구매했다. 어두운 톤의 원목 가구에 관심이 생겨 다 같은 톤으로 통일했다. 조금은 어두워 보이지만 차분하고 가라앉은 분위기의 방안이 만족스럽다. 침구도 짙은 초록색으로 구매했다. 진한 분위기의 침실이 마음에 든다. 겨울이 되면 따뜻한 담요도 구매해야지. 거실에 원형 테이블을 놓았다. 가구를 들였으니 꽃과 식물을 사야지, 아직 커튼을 달지 않아 침대 머리맡 창으로 해가 쨍하게 들어온다. 원목 가구에 빛이 드는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든다. 내가 좋아할 수 있는 공간이라 다행이야. 그런데 쓰고 보니 온통 소비 초점이네, 미니멀 라이프 해야 하는데..
마음에 드는 빈티지 제품을 구매했다. 예전부터 갖고싶었던건데, 가게를 이전하는 곳에서 괜찮은 가격에 구매할 수 있었다. 낡았지만 클래식한 느낌이 좋다. 오랜만에 들어간 내 버킷리스트에 소장하고 싶은 빈티지 제품 리스트가 있는 걸 발견했는데, 한 줄을 지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버킷리스트라고 작성한 것들 중에 이루고 있고, 이뤄진 것들이 꽤나 있었다. 괜히 불안감이 덜어진다.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는 건지 문득 궁금해질 때 한 번씩 들어와서 봐야겠다.
오트밀로 만들 수 있는 요리에 관심이 생겼다. 아침식사로 오버나이트 오트밀을 먹은지 3개월째, 집에 있는 오트밀로 다양한 요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책을 구매했다. 책을 참고해 오트밀을 끓여서 죽처럼 먹기도 하고, 바나나와 견과류를 넣어 베이크드 오트밀로 먹기도 하고, 스콘이나 쿠키도 만들었다. 그렇지만 제일 오트밀을 잘 활용했다고 느껴지는 건 역시 오버나이트 오트밀이다. 아침에 먹기도 간편하고 소화도 잘되고, 햄프 시드와 카카오 닙스, 견과류를 넣고 과일을 얹어먹으면 맛도 좋고 포만감도 상당하다. 다이어트나 비건 요리로도 관심이 이어져 보존식 샐러드와 비건 및 저 칼리로 식사로 도시락을 만드는 책도 구매했다. 잘 참고해서 식사에 활용해야지. 정말 요리를 배워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무실에서 빵이랑 떡을 공구했다. 처음에는 그냥 장난식으로 점심시간 후에 빵을 먹을까 했는데, 택배 배송이 되는 유명한 빵집에서 빵을 공동 구매하자고 이야기가 나왔고, 자타공인 사무실 빵순이인 내가 총대를 메고 엑셀을 켰다. 컴활 1급 자격증을 취득한 보람이 있다. 배송비를 줄이고 맛보기 어려운 빵을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진행했다. 배송 품목이 음식이고 사무실이라는 배송지 특성상 배송 일정을 맞추는것이 번거로웠지만 수월하게 진행됐다. 빵도 떡도. 두 차례의 공동구매가 이루어졌고 나름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사무실 선생님들 모두 살림을 하시는 분들이라 이런 이벤트에 긍정적으로 호응해주셔서 다행인 것 같다. 그리고 나도 새로운 재능을 발견한 듯하다. 총대..
클로이팅 챌린지에 도전했다. 2주 동안 영상을 따라 하면서 몸을 만드는 영상이 외국에서부터 유행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어느샌가 내 주변에도 꽤나 그 영상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운동을 열심히 하던 중 살이 빠지고 자연스럽게 복부에 근육이 생기면서 복근이 생겼으면 생각을 했다. 그래서 정말 2주 동안 매일 따라 해 봤다. 결과적으로 복근이 생기긴 했다. 하지만 참 누군가 그랬는지 복근이라는 게 아침에만 만났다가 저녁 되면 없어지는 친구인데 이걸 계속 유지한다는 거 자체가 욕심이고 비현실이라는 게 정말인 것 같다. 저녁만 되면 없어져. 식단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사실 이젠 다이어트고 뭐고 운동하는 것 자체를 즐기다 보니 식단에 그리 신경 쓰지 않긴 하지만. 어쨌든 무언가 확실하진 않지만 확실하지 않은 것에 도전하고 확실하지 않은 무언가를 확실하게 억지로 만들어 낸 느낌이라 새롭다. 그렇게밖에 이 이상한 기분을 설명하지 못하겠어 왜 있다 없어지냐고.
어김없이 다도모임에 나갔다. 코로나때문에 미뤄졌던 창덕궁 나들이와 찻집 투어를 이제야 할 수 있게 되었다. 토요일 오전 근무가 있던 날 한가했던 컴퓨터를 끄고 안국역으로 향했다. 한복을 빌려 입고 먼저 궁을 돌아다니는 일행들에 합류했다. 날씨도 화창하고 가을의 길목에 곳곳에 단풍이 들어오기 시작해 시기가 참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원래 일정이었던 봄~여름쯤보다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궁 한 바퀴 산책하고, 창덕궁 근처 티 카페에 갔다. 밀향이 아주 살짝 나는 홍차를 마셨던 거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복이 여간 불편해서였는지도.
3학기 다도모임의 마지막은 하얏트 라운지 에프터눈 티 파티였다. 역대급으로 잔치를 벌인날.. 하얏트 호텔 라운지 뷰가 참 좋더라. 시원한 통창 밖으로 가을 날씨가 좋아 더 넓고 깊게 서울이 눈에 들어온다. 깊지 않은 중간쯤에서 흐드러진 얇은 맛의 녹차를 마셨는데, 디저트가 굉장히 단 편이라 조금 더 묵직한 걸 먹었어도 괜찮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좋아하는 빙수는 정말 맛있었다. 가을이라, 단감과 밤이 들어간 디저트들이 많이 보이는 것 같다.
이사를 며칠 앞둔 주말 운동도 하지 않고 집에서 쉬며 리틀 포레스트를 봤다. 이게 이런 영화였나 싶은 정도로 전에 봤던 기억과 느낌과 너무 달랐다. 특별한 이벤트도, 자극도 없는 영화를 2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른채 봤다. 하고 싶은 것도 있고, 한순간도 헛투루 산 적 없는데, 내게 주어진 현실은 쉬이 감당하기엔 가슴이 답답해져 오고.. 도피성으로 이전의 무언가를 자꾸 찾고, 피곤해져 오는 건 피하고, 이런 주인공의 모습에 집중했던 것 같다. 잘 정돈된 주방에서 시간을 들여 음식을 만들고 그 시간들 들여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도. 발 디딜 틈 하나 없는 서울의 옥탑방에 있던지, 틈은 있지만 내 자리가 맞는지 의심이 되는 스러져가는 시골집에 있던지, 나만의 작은 숲을 만들어 가면 된다는 마지막 즈음의 내레이션을 듣고 한참을 생각했다. 다시 이사를 하려는 지금 나는 내 숲을 잘 만들고 있는 걸까. 새로 나고 비가 오고 천둥 치면 스러지기도 하는 나무 하나하나에 너무 열을 올렸던 것은 아닐까. 소중하다는 이유를 대고 집착하고 있던 것 같은데, 잘하고 있기는 한 걸까. 주변에서는 잘하고 있다고 하는데. 난 왜 계속 불안할까. 숲은, 초록빛은 오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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